런 온 E16


갑자기 나한테 밥을 왜 해 먹여요?

오미주 씨 잘 때도 많이 했는데
한 번을 같이 못 먹었네요?

음, 그땐 그랬었지
기선겸 씨는 해 떠 있을 때가 낮인데
난 달 떠 있을 때가 낮이라서

오, 그래도 우리 이제 밤낮이 같아졌어요
고마워요

뭐가요? 존재 자체가?

어, 그것도 그렇고
우리 누나요
우리 누나 얘기 들어 주고 어루만져 줘서
그거는 내가 못 하는 거거든요

못 하시는구나, 음

먹어 볼게요

응? 음, 맛있는데?

뭐지? 이거 거의 리비에라에서 
먹었던 클래스인데?

맛집이에요?

으음, 나 원래
작업 하나 마치면 여행 가고 싶어지거든요?
씁, 언제였더라?
그, 내가 작업하던 영화 배경지가
이탈리아 휴양지였어요
사용 언어는 영어였고
근데 그 작업 하는 내내
마치 내가 거기 사는 외국인인 
그런 기분이 드는 거예요
도시 자체도 너무 아름답고
그래서 뭐 결국 페이 몽땅 털어 가지고
여행 갔지, 뭐
거기 사는 외국인 기분 내러

음, 혼자요?

응, 나 원래 혼자 잘 다니거든요
핸드폰으로 지도도 안 보고
그냥 이정표만 보면서 따라다니는
그런 자발적으로 혼자인 시간이 좋아 가지고

얘기 더 해 줘요
더 듣고 싶어요

음, 아, 돌아오는 비행기에서 
웬 독일 영화 한 편을 봤는데
기내 자막이 꽤 괜찮았던 거 같고
응, 꽤 괜찮았고
뭐, 식당을 가도 그렇고 카페를 가도 그렇고
다 외국인들뿐이니까
내가 웬만한 영어는 다 들리거든요?
근데 거기 있는 모든 사람들이 
다 영어를 쓰는 게 아니잖아요

그래서 답답했어요?

아니요, 그 외국어의 정확하게 
닿지 않는 지점이 오히려 
좋더라고요, 저는
딱 필요한 말만 하면 되니까 
쓸데없는 말 안 해도 되고

예를 들면요?

뭐, 예를 들면 
'안녕하세요', 
'이거 얼마예요'
'감사합니다' 뭐, 이런 거?
말하다 보니까 다시 가고 싶네

언제 다시 갈 건데요?

 

글쎄요

다음엔 나랑 같이 가요
아, 나도 거기 있었으면 좋겠다, 같이

같이 가게 해 준다, 내가
같이 가요, 갑시다
짐 싸요
어? 지금요? 아,
나 내일 출근해야 돼서
아유, 아쉽지만 같이 못 가겠네요

아니, 그냥 해 본 말이잖아요
누가 지금 당장 같이 가재?

음, 아쉽다


우리 단아도 왔구나

회장님이 잘 숨기신 덕분에 
이제야 왔네요, 제가
저 패륜아 만드시게요, 진짜?

너처럼 예쁜 패륜아가 어디 있어
그래도 다들 보니 좋구나
사랑했다

어쩌라는 거예요

그랬다고

좀 주무세요, 아버지


근데, 나 위로해 주는 거예요?

내가 왜 위로를 해 줘요?

내가 지금 위로받고 있는데

왜 또? 무슨 일 있었어요?

우리 누나요, 우리 누나는
나보다 훨씬 더 아버지한테 사랑도 받고
또 그만큼 정신적 학대도 많이 받았어요
근데 아버지는 그것도 다 사랑이라고 하는데
우리는 도대체 뭘 받고 자랐는지 
모를 때가 더 많았거든요
내가 오늘, 누나에 관해서
좀, 충격적인 사실을 알게 됐는데
누나가 그걸 모른 채 있으면 
바보 되는 기분이라서
내가 그냥 가만히 보고 
있을 수가 없을 것 같아요
근데 그걸 말하면 상처받을 거고
그 상처 바라보기도 어려울 거 같고

기선겸 씨는, 음
원래 생각한 건 바로 행동하고
행동에 대해서 후회하지 않죠

근데 이번엔 왜 망설였어요?

왜 여기 있을까?
본인도 상처받았기 때문이죠
그 불편한 사실에

몰랐네
아직도 모르는 거 너무 많네
누나가 이럴 거다, 저럴 거다
우리끼리 이렇게 추측하지 말고
음, 그냥 말을
마음을 잘 전달해 봐요
누나가 상처받으시면 이렇게 안아 드리고
그런 게 가족 아닌가?

그런 게 가족이구나

이제라도 알았으니 다행이네요

고마워요


이영화 씨 왔습니다

들어오라고 해요 



죽어 버린다더니
네 발로 찾아왔다?

대표님 시간 뺏기 싫어서
대표님한텐 시간이 제일 중요한데
나한텐 대표님이 제일 중요하니까
그런 대표님을 위해서 할 수 있는 게
내가 마음을 빨리 정리하는 거더라고
안 받아요? 대표님 그림

이걸 이렇게 받네
나한테 주기 전까진 네 거라며
그거 네 마음이잖아

내 마음은 이미
마음대로 다 가져가 놓고

어떻게 돌려줄까?

계속 갖고 있어요
대표님 안에서 다 없어질 때까지
잘 갖고 있다가
분리수거만 잘해 줘요
그거 중요하다면서

하, 너 진짜

나는요
아직도 똑같아요
대표님이 무슨 짓을 해도
싫어지지가 않고, 계속 좋아
그러니까
계속 좋아하는 것도 내 자유잖아
하지 말라고 할 거예요, 또?

아니, 너 해
너 하고 싶은 대로 다 해

오래 살아요
아프지 말고
나의 첫사랑
대답해야죠, 응?

오래 살게, 안 아플게


나, 알고 있었어요
알면서 계속 만났어
그랬으면서
나는 또 걔가 끝내지 않길 바랐어
내가 선 그어도
계속 쫓아오길 바란 거지
내가 어디에 있든 볼 수 있게

영화 씨가 무슨 천리안도 아니고

나 이 엔딩 잘 알거든요
좋아했던 건
다 미련으로 남았으니까

미련 남기기 싫어서라도 
안 좋아할 뻔했겠네

그러려고 했죠
근데 마음이
마음대로 잘 안됐네, 내가

아, 여기 이거 술 대표님이 사는 거죠?
메뉴 보니까 전반적으로 좀 비싸던데

내가 재벌인데 얻어먹을까, 설마 서민한테

오늘은 서민 소리가 나쁘진 않네

나도 서민 하고 싶다

음, 바꿀래요?

아니요 


암만 출품을 해도 영화제 측에서 
초청을 안 해 줘서 못 가 봤었는데
번역을 잘해 주신 거 같습니다
덕분에 초청받아서 저
두바이 영화제에 갑니다 

어머머, 웬일이야, 너무 잘됐다
와, 진짜, 와, 너무 축하드려요
아, 내가 자막을 여러 번 수정한 보람이 있네

여러 번 수정,
그렇죠, 제가 진짜 더럽게 많이 괴롭혔죠
영어도 쥐뿔도 모르면서

아유, 뭐, 감독님 입장에서는
직접 쓰신 글이 다른 언어로 
번역되는 거니까 이해해요

덕분에 번역가님도 저 많이 괴롭혔죠
나 진짜 아차 싶더라
내가 버튼 누른 거 같아서

하, 참, 여전히 말씀을 참 아름답게 하시네요

하, 저한테 진짜 화도 많이 내셨는데

참 엊그제 같은데
번역 구하신다고 커뮤니티에 
올라온 거 컨택했을 때

하, 불리하시면 꼭 그렇게 
말 돌리시곤 하셨는데

그때도 잡과 잡 사이에서 
우연히 본 거였는데
참 어쩐지 끌리더라고요

영화는 착한데 넌 성격이 왜 그 모양이냐
이 새끼, 저 새끼 욕도 많이 하시고

아유, 진짜
아니, 지금 다 지난 일이라
아름답게 포장하려고 
노력하고 있잖아요, 아, 좀

번역가님이 인볼브해 주신 덕분이에요 
고맙습니다

이제 와서요?

뭐, 이제라도 포장에 일조해 보자는 거죠
아름답게

아, 진짜

아유, 잘됐네요

고마워요, 진짜


아메리카노 한 잔
테이크아웃해 주시고
미안해요

네?

그때 내가 했던 짓거리가 좀
무례했던 거 같아서
남의 감정을 막 그렇게 묻고 
그러면 안 됐던 건데

좋아해요
물어 준 사람이 처음이라
사실 대답하고 싶었어요, 그때
말 한마디면 되는 건데

나 사실, 결혼하기 싫어서
집에다가 가짜 커밍아웃 했어요
누군가에겐 일생일대의 굴레였을 텐데
나는 그거 핑계로 삼았어서
미안합니다

주문하신 커피 나왔습니다


나도 보고 싶어

잘 어울리네요
둘 다

네가 뒤에 있으니까

 

오늘은 없어요?
그림 감상평

어떻게 하면 그렇게 그려요?
대체 뭘 먹고 뭘 보면
학생 안이 어떻게 돼 있으면 
그림을 그따위로 그리나 싶던데

음, 밥버거 많이 먹어요
그리고 전시나 영화도 많이 보고요
그리고 제 몸 안이 어떻게 되어 있는지는
저도 잘 모르겠네요
들어갔다 나와 본 게 아니라서

안이 어떻게 돼 있는진 몰라도 
그림엔 아주 시꺼멓던데, 끈적거리고

내가 그 안에 들어갔다 
나와 보니까, 아주 반짝이더라
오늘로 하자, 내 진짜 생일

생일 축하해요, 대표님


우리는 아마 평생 서로를 이해 못 하겠죠?

응, 서로 다른 사람이니까

저 사람은 저렇구나
나는 이렇구나
서로 다른 세계를 나란히 둬도 
되지 않을까? 그렇죠?
그러니까 우리 서로를 이해 못 해도 
너무 서운해하지 맙시다
그건 불가해한 일이고
우리는 우리여서 할 수 있는 것들을 
해내면 되지

내가 사랑한다고 말한 적 있던가요?

지금인 것 같아서

우리가 사랑을 말할 때?

사랑해요



Run On


 

© なな